경제타임스 김은국 기자 | 원화의 실질적인 구매력을 나타내는 지표가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약 16년 만에 최저치로 주저앉았다. 고환율 국면이 장기화되는 가운데, 국내 투자자들의 거센 해외 투자 열풍과 연기금의 달러 매수세가 원화 가치를 끌어내리는 '수급의 덫'이 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 100 아래서 신음하는 원화…2009년 이후 가장 낮다
12월19일 국제결제은행(BIS, Bank for International Settlements)에 따르면 11월 말 한국 원화의 실질실효환율(REER, Real Effective Exchange Rate) 지수는 87.05를 기록했다. 이는 전월 대비 2.02포인트 급락한 수치로, 지난 7월부터 5개월 연속 하락세를 이어가고 있다. 2010년 물가 수준을 100으로 잡았을 때 현재 원화의 가치가 13%가량 저평가되어 있다는 뜻이다.
특히 이번 지수는 리먼 브라더스 사태의 여파가 남아있던 2009년 4월(85.47)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다. 실질실효환율은 단순 환율뿐만 아니라 교역국 간의 물가 상승률 차이까지 반영한 지표다. 이 지표가 낮다는 것은 우리 국민이 해외에서 물건을 사거나 여행을 갈 때 느끼는 실제 구매력이 과거 위기 수준만큼 위축됐음을 의미한다.
■ '서학개미'와 '연금'이 띄운 달러…원화는 홀로 약세
원화 가치 급락의 주범으로는 단연 '수급 불균형'이 꼽힌다. 11월 평균 달러-원 환율은 1,457.77원으로 치솟았고, 12월 들어서는 1,471.40원까지 오르며 원화 약세를 가속화하고 있다.
주목할 점은 국내 자본의 '脫한국' 현상이다. 지난 10월 서학개미(해외 주식 개인투자자)들이 사상 최대 규모의 미국 주식 쇼핑에 나서면서 달러 수요를 폭발시켰다. 여기에 국민연금의 해외 투자용 달러 매수세까지 겹치며 원화 가치를 방어할 '방벽'이 무너진 상태다. 과거 유가 등 대외 변수에 흔들렸던 것과 달리, 지금은 내부의 자본 유출이 원화 가치를 압박하는 모양새다.
■ 엔화 다음으로 낮은 가치…위안화에도 역전당해
주요국 통화와 비교하면 원화의 위상은 더욱 초라하다. BIS가 조사한 64개국 중 원화보다 실질가치가 낮은 통화는 만성적인 저가치를 유지 중인 일본 엔화(69.4)가 유일하다. 지난달까지만 해도 우리보다 지수가 낮았던 중국 위안화(88.6)마저 11월 들어 반등에 성공하며 한국을 추월했다.
금융업계 전문가는 "환율 상승이 수출 경쟁력에 도움이 되던 과거 공식이 깨진 상황에서, 실질가치 하락은 수입 물가 상승과 소비 위축이라는 악순환만 불러올 수 있다"며 "국내 자산의 매력도를 높여 자본 유출을 막는 근본적인 대책 없이는 2009년의 악몽이 재현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고 경고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