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제타임스 전영진기자 | 물가 상승률에도 못 미치는 저조한 수익률로 도마에 오른 퇴직연금 제도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정부와 여당이 노후 소득 보장 강화를 위해 퇴직연금 기금화를 연금개혁의 핵심 축으로 추진하면서, 430조 원 규모의 퇴직연금 시장에 새판 짜기가 시작될 전망이다. 저조한 수익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문가가 통합 운용하는 기금 형태로 제도를 손질해 수익률을 높이겠다는 것이 정부·여당의 방침이다.
국민연금처럼 통합 운용… '규모의 경제'로 수익률 개선 목표
현행 퇴직연금은 근로자가 은행, 보험사, 증권사 등 민간 금융기관과 개별 계약을 맺고 직접 운용 지시를 하는 계약형이 90% 이상을 차지한다. 이로 인해 '규모의 경제'를 구현하기 어려워 수익률이 낮아지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실제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퇴직연금의 최근 5년 및 10년간 연 환산 수익률은 각각 2.86%, 2.31%에 그쳐 물가상승률에 미치지 못했다.
이에 정부와 여당은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을 통해 수익률을 제고하겠다는 계획이다. 기금형은 투자전문가 집단으로 구성된 대형 중개조직이 가입자를 대신해 적립금을 관리·운용하는 방식으로, 전문적인 운용을 통해 연 6~8%의 중립적인 수익률과 규모의 경제를 통한 비용 절감 등을 기대할 수 있다.
국회 법제화 논의 본격화, 운용 주체 놓고 이견
국회에서는 이미 기업 규모와 관계없이 모든 근로자가 기금형 퇴직연금에 가입할 수 있도록 하는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 개정안이 잇따라 발의되며 법제화 논의가 본격화됐다. 다만, 개정안들은 운용 주체에 있어 차이를 보인다.
더불어민주당 안도걸 의원은 현재 30인 이하 중소기업에 도입된 기금형 제도를 전체 사업장으로 확대하되, 근로복지공단뿐 아니라 요건을 충족한 민간 퇴직연금사업자도 참여를 허용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같은 당 한정애 정책위의장은 노사 공동 수탁법인을 설립해 운용하고, 100인 초과 사업장의 경우 국민연금도 운용 주체로 참여하도록 하는 개정안을 발의했다.
이 외에도 별도의 퇴직연금공단을 설립하여 제도 관리·감독과 운용 업무를 담당하게 하자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이는 국민연금공단과 국민연금연구원을 둔 형태와 유사하다.
시민찬성 31% vs 반대 19%… 손실 우려와 전문성 기대 공존
이러한 퇴직연금 기금화 방안에 대해 시민들의 의견은 엇갈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고용복지학회가 시민 2천 명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 약 31%가 퇴직연금의 국민연금식 기금화에 찬성했으며, 반대 의견은 약 19%였다.
찬성하는 이들이 꼽은 가장 큰 이유는 '기금 전문 운용기관 간의 경쟁을 통한 수익률 제고'(47.2%) 기대였다. 또한 '여러 운용 기관을 비교·선택할 권한 보장'(26.7%), '개인의 운용 부담 감소'(21.7%) 등도 찬성 사유로 꼽혔다.
반면, 반대 의견자들은 '손실 가능성이 높을 것 같다'(40.2%)는 우려를 최대 사유로 들었다. '기존 민간 금융기관과 다를 바 없어 실효성 의문'(33.5%)과 '개인의 직접적 운용 선택권 축소'(17%) 등도 반대 이유로 제시됐다.
'국민연금화' 불신과 민간 시장 교란 우려도 걸림돌
기금화 찬성 진영은 이미 '중소기업퇴직연금기금'(푸른씨앗)과 같은 소수 영역에서 성공 사례가 있고, 미국·호주 등 퇴직연금 선진국이 기금화 체제를 갖추고 있다는 점을 근거로 제시한다. 또한 퇴직연금 시장의 투자가 활성화되면 자본시장으로의 자금 유입도 활발해질 것으로 기대하며, 이는 코스피 활성화 정책과도 맥락을 같이한다.
하지만, 금융업을 중심으로 한 반대 측은 기금 운용기관이 무조건 고수익을 올린다고 단정하기 어렵고, 기존 퇴직연금 시장을 교란하는 부작용이 클 것이라고 반박한다. 특히 공공이 운용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그동안 시장 성장을 이끌어 온 민간 퇴직연금 사업자들의 반발이 거세고, '국민연금화'에 대한 국민적 불신이 여전해 또 하나의 공적 기금이 탄생했을 때 운용 실패의 책임이 결국 국민에게 돌아올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된다.
결국 기금형 도입만으로 수익률을 높이긴 어렵다는 지적이 상당하며, 민간 참여를 통한 경쟁 구도를 유지하고 수탁기관의 책임을 강화하는 등 제도 보완이 뒤따라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이에 민주당은 손실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원금 보장에 가까운 한국형 기금형 퇴직연금 모델을 설계하기 위해 전문가 의견을 수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