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센느가 무명의 시간을 견디며 사람들의 사랑을 얻기까지는 2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어렵게 쌓아 올린 신뢰를 흔드는 데에는 단 몇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최근 '걸그룹 리센느를 둘러싼 논란'은 한 아이돌의 해프닝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쉽게 사람을 낙인찍고, 사실보다 먼저 판단하는지를 보여준 하나의 사회적 장면이었다. ■ 중소돌의 기적을 흔든 한마디 리센느는 이른바 '중소돌의 기적'이라 불린다. 대형 기획사의 막대한 자본과 홍보에 기대기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멤버들은 2년 넘게 묵묵히 무대를 이어갔다. 수백 차례의 자체 라이브 방송으로 팬들과 소통했고, '거제 야호'라는 친근한 콘텐츠는 입소문을 타며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결국 발매 당시 큰 주목을 받지 못했던 노래는 2년 만에 국내 음원 차트 정상에 오르며 보기 드문 역주행 신화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어렵게 쌓아 올린 성과는 한순간의 논란 앞에서 흔들렸다. 영상 속에서 사용된 "무섭노"라는 표현이 일부 온라인 공간에서 정치적 의미를 지닌 표현으로 해석되면서 논란이 시작됐다. 원래 경상도 지역에서 오랫동안 사용되어 온 '-노' 종결어미는 일부 극우 성향 온라인
필자는 30년이 넘는 공직생활 동안 수많은 국가 정책과 제도개혁을 지켜봤고, 직접 추진했으며, 때로는 그 결과를 평가하는 자리에도 있었다. 그 긴 시간 동안 한 가지 분명히 확인한 사실이 있다. 성공한 개혁은 충분한 검증 위에서 시작됐고, 실패한 개혁은 언제나 속도가 검증을 앞섰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사관학교 통합 논의를 바라보는 우려는 더욱 크다. 국가의 미래를 좌우할 장교 양성체계를 충분한 사회적 논의와 검증 없이 성급하게 추진하는 사례를 공직생활 동안 거의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번 사관학교 통합 논의는 국방개혁의 한 사례이지만, 동시에 국가 시스템을 어떻게 개혁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시험대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글은 사관학교 통합 자체를 넘어, 국가 시스템 개혁이 지켜야 할 기본 원칙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국가 시스템을 바꾸는 개혁은 필요하다. 급변하는 안보 환경 속에서 우리 군이 과거의 틀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점에는 누구도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국가안보의 백년대계를 책임질 장교 양성체계를 충분한 사회적 합의와 검증 없이 서둘러 바꾸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 정부의 명분과 국민의 질문 정부는 미래전 대응, 합동성
2010년 초반, 필자가 OECD에서 근무하던 시절 유럽의 여름은 지금과는 전혀 달랐다. 대부분의 가정과 사무실에는 에어컨이 설치되어 있지 않았고, 그것이 오히려 낯설게 느껴질 정도였다. 여름은 덥더라도 견딜 만한 계절이었고, 밤이면 선선한 바람이 낮의 열기를 식혀주곤 했다. 그러나 불과 10여 년이 지난 오늘, 유럽은 전혀 다른 현실과 마주하고 있다. 기록적인 폭염이 반복되면서 에어컨은 더 이상 사치품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필수 장비가 되었고, 냉방기기 수요 급증과 전력 수급 문제는 중요한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 에어컨이 사치품에서 생존 장비로 바뀌는 순간, 기후위기는 더 이상 미래의 경고가 아니라 우리의 일상을 바꾸는 현실이 되었다. ■ 유럽의 변화는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최근 우리나라 역시 기록적인 폭염이 이어지고 있다. 경북 경산에서는 전국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기온이 기록되는 등 폭염은 이제 예외적인 현상이 아니라 일상이 되고 있다.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2025년 우리나라에서는 4460명의 온열질환자가 발생했고, 29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됐다. 유럽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국제학술지 『Nature Medicine』에 발표된 스페인 바르셀로
이번 월드컵 최고의 '씬 스틸러'는 우승팀도, 화려한 슈퍼스타도 아니었다. 대중의 기억 속에 가장 강렬하게 각인된 팀은 인구 50만 명 남짓의 작은 섬나라 카보베르데였다. 월드컵 첫 출전이라는 무게감 속에서도 그들은 강팀들을 상대로 단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결과보다 과정이, 점수보다 태도와 조직력이 더 큰 울림을 남겼다. "패했지만 패자가 아니었다"는 평가는 그들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찬사였다. 이번 월드컵은 우승팀보다 더 오래 기억될 하나의 이야기를 남겼다. 세계는 작은 섬나라를 통해, 그동안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가능성을 발견했다. ■ 서렌디피티란 무엇인가 '서렌디피티(Serendipity)'라는 단어를 많은 사람들이 처음 접한 것은 영화 《Serendipity》를 통해서였을 것이다. 영화 속 서렌디피티는 우연한 만남이 운명으로 이어지는 사랑을 의미한다. 오늘날 이 단어는 조금 더 넓은 의미로 사용된다.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 속에서 새로운 가치와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 그것이 서렌디피티다. 하지만 진정한 서렌디피티는 단순한 행운이 아니다. 우연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지만, 그 우연을 기회로 만드는 것은 준비된 사람뿐이다. 그래서 서렌디피티는 '
나는 학생들에게 AI 사용을 금지하지 않는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활용하라고 권한다. 새로운 기술을 배우고, 그것을 자신의 공부와 일에 연결하는 능력 역시 중요한 공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사회에 나가면 AI를 얼마나 잘 활용하느냐도 중요한 경쟁력이 될 것이다. 하지만 반드시 지키게 하는 원칙이 하나 있다. AI에게 묻기 전에 먼저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AI를 활용한 뒤에는 무엇이 달라졌는지, 왜 생각이 바뀌었는지를 함께 설명하도록 한다. 처음에는 번거롭다고 느끼던 학생들도 시간이 지나면 한 가지를 깨닫는다. AI는 답을 제시할 수는 있지만, 자기 생각까지 대신 만들어 주지는 못한다는 사실이다. ■ 모범답안의 시대는 끝났다 공부를 잘한다는 말은 오랫동안 정해진 길을 잘 따라간다는 뜻에 가까웠다. 교과서를 성실히 읽고, 중요한 부분에 밑줄을 긋고, 문제집을 여러 번 풀고, 시험지 위에 정답을 정확히 적어내는 사람을 우리는 공부 잘하는 사람이라 불렀다. 틀리지 않는 사람이 우수한 사람이었고, 빠르게 외우는 사람이 앞서가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AI는 방대한 지식을 모으고, 요약하고, 비교하며, 논리적인 문장으로 정리한다. 사람이 며칠 걸
스타벅스의 ‘탱크데이’ 마케팅과 배재고 야구부의 응원 구호 논란이 며칠 사이 우리 사회의 뜨거운 쟁점이 되었다. 기업의 부적절한 마케팅과 학생들의 치기 어린 응원 구호 문제로 보였던 이 사건은 정치권의 공방으로 번졌고, 대통령의 언급과 대통령 직속 위원회 인사의 발언까지 이어지며 증폭되었다. 이제 이 문제는 스타벅스만의 문제도, 배재고만의 문제도 아니다. 우리가 마주한 본질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표현의 자유는 어디까지 허용되어야 하는가. ■ 표현의 자유와 책임 사이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가장 강력한 기둥이다. 헌법이 이 자유를 보장하는 이유는 듣기 좋은 말만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때로는 불편한 말, 틀린 말, 다수의 정서와 어긋나는 말이라도 자유로운 논의 과정에서 드러나고 걸러질 수 있어야 민주주의는 유지된다. 그러나 모든 표현이 무제한 보호될 수는 없다.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거나, 폭력을 선동하거나,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를 조장하는 표현까지 허용할 수는 없다. 자유는 민주주의의 기둥이지만, 책임 없는 자유는 공동체를 흔드는 칼이 될 수도 있다. 세계 각국은 이 문제 앞에서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다. 미국은 ‘사상의 시장
최근 베네수엘라와 일본 북부 해역에서 잇따라 강한 지진이 발생했다. 두 지역 모두 큰 흔들림을 겪었지만, 결과는 달랐다. 일본은 비교적 제한적인 피해에 그친 반면, 베네수엘라에서는 건물 붕괴와 큰 인명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전해졌다. 지진의 규모만 놓고 보면 자연현상은 비슷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재난의 결과는 전혀 달랐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했을까. ■ 재난의 차이를 가르는 힘, 레질리언스 핵심은 레질리언스, 즉 회복탄력성이다. 레질리언스는 단순히 재난을 견디는 힘만을 뜻하지 않는다. 충격을 받았을 때 피해를 최소화하고, 무너진 기능을 빠르게 회복하며, 같은 피해가 반복되지 않도록 더 나은 상태로 다시 일어서는 능력이다. 도시와 국가의 레질리언스는 건물의 내진성능, 조기경보 체계, 행정의 대응 속도, 시민의 안전의식, 공동체의 협력 수준이 함께 작동할 때 만들어진다. 결국 재난 앞에서 중요한 것은 “충격이 오느냐, 오지 않느냐”가 아니다. 그 충격을 사회가 얼마나 흡수하고, 얼마나 빨리 회복하며, 다시는 같은 방식으로 무너지지 않도록 얼마나 배워 나가느냐이다. ■ 유리공 사회와 떨튀공 사회 나는 레질리언스가 있는 도시와 그렇지 못한 도시를 설명하기 위해
최근 반도체 산업의 회복세로 국가 세수가 예상보다 크게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나라 살림에 여유가 생긴다는 소식은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마냥 반길 수만은 없다. 지금의 세수 호황은 경제의 기초 체력이 근본적으로 개선된 결과라기보다, 특정 산업의 사이클이 가져온 일시적 성과에 가깝기 때문이다. 가계로 비유하면 연말 보너스와 같다. 월급이 오른 것도 아닌데, 한 번 들어온 보너스를 매달 들어올 고정 수입처럼 여기고 씀씀이를 늘린다면 가정 경제는 금세 흔들리기 마련이다. 국가 재정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 성과급에 취해 고정 지출을 늘리는 위험 문제는 초과 세수가 발생할 때마다 되풀이되는 정치권의 관성이다. 새로운 지원금, 각종 현금성 정책, 단기 인기 사업들이 앞다퉈 거론된다. 당장은 환호를 받을 수 있을지 몰라도, 이러한 사업들은 한 번 시작되면 예산 구조를 경직시키고 좀처럼 줄이기 어렵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공유지의 비극’은 국가 재정에서도 경계해야 할 현상이다. 모두의 자산인 국가 재정을 각자의 정치적 성과를 위해 경쟁적으로 소비하기 시작하면, 결국 공동체 전체의 미래 대응 능력은 약화된다. 재정이 더 이상 안전판이 아니라 부담의 원천으로
윤철순 칼럼니스트 | ‘투자의 귀재’로 불리는 워런 버핏과의 마지막 자선 오찬 경매가 최근 135억원에 낙찰됐다는 소식이 세상을 흔들었다. 얼핏 보면 제정신인가 싶다. 아무리 세계적인 투자자와의 식사라지만, 한 끼 밥값이 135억 원이라니. 하지만 자본은 원래 그런 생물이다. 돈은 돈 냄새를 맡고 움직인다. 낙찰자는 단순히 밥값을 지불한 게 아닐 것이다. 세계 최고 투자자와의 네트워크, 상징성, 브랜드 가치, 글로벌 주목도, 그리고 그 이상의 무형 자산을 계산했을 가능성이 크다. 자본주의 논리로 보면 어쩌면 합리적 투자일 수 있다. 문제는 따로 있다. 135억짜리 점심 얘기 뒤편에서 누군가는 오늘도 폐지를 줍는다. 서울 변두리 새벽 골목엔 리어카를 끄는 노인들이 여전히 넘쳐난다. 로또 1등에 당첨돼도 서울에서 번듯한 집 한 채 마련하기 어려운 시대다. 청년들은 “벼락거지”라는 자조를 입에 달고 살고, 월급은 통장을 스친다. 그런데도 세상은 연일 “코스피 8000 시대”를 외친다. 증시는 불기둥처럼 치솟고 AI와 반도체는 새로운 황금 광맥이 됐다. 누군가는 하루 만에 수억원을 벌었다며 인증 사진을 올리고, 누군가는 그 불기둥을 멍하니 바라보다 상대적 박탈감에
장승래 칼럼니스트 | 대기업에서 20여 년을 일한 뒤 스타트업을 창업한 나에게, 회사라는 울타리도 브랜드라는 보호막도 없이 오롯이 ‘나’라는 이름으로 시장과 맞서는 일은 마치 사막에 홀로 남겨진 듯한 기분이었다. 모든 것을 스스로 증명해야 한다는 사실은 두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싸움이 해볼 만하다고 느끼게 된 이유는 분명했다. 스타트업이 대기업보다 훨씬 더 강한 경쟁력을 발휘하는 영역이 있기 때문이다. 스타트업이 대기업의 틈바구니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힘은 넉넉한 자금도, 풍부한 인재도, 충분한 시간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빠른 의사결정과 실행력, 죽기 살기로 버티는 간절함, 그리고 무엇보다 고객을 향한 집요함이 스타트업의 본질적인 경쟁력이다. 창업한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았을 때, 우리는 첫 상용 앱 "디버"를 만들어냈다. 함께 대기업을 나와 창업한 동료들과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우리가 여전히 대기업에 있었다면 이런 속도가 가능했을까?” 아마 기획서 결재 단계에서만 수개월이 흘렀을 것이다. 예산을 조율하는 데에도, 관련 부서와 협의하는 데에도 또 수개월이 걸렸을지 모른다. 어쩌면 출시 자체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