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타임스 박항준 논설위원 | 인간은 망각의 존재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경험과 지식을 쌓아가지만, 그 대부분은 의식 속에서 희미해지거나 무의식의 어두운 창고로 밀려난다. 그러나 잊힌 것은 결코 사라진 것이 아니다. 뇌과학자들은 기억이 특정한 계기로 재소환될 수 있음을 말한다. 냄새 하나, 노래 한 소절, 누군가의 말 한마디가 어린 시절의 장면을 불현듯 떠올리게 하듯이 말이다.
이제 우리는 이 기억의 소환을 돕는 새로운 존재를 맞이했다. 바로 인공지능이다. AI는 단순한 계산기나 검색 엔진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인간의 장기기억 장치를 건드리는 자극처럼 작동한다. 내가 의식적으로 기억해내지 못했던 개념이나 문장을 AI가 제시하는 순간, 내 안에 깊이 묻혀 있던 경험과 지식이 되살아난다. 이 과정은 단순히 외부의 데이터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무의식을 깨우는 행위에 가깝다. 그렇기에 “AI는 나도 모르게 인간의 장기기억 장치를 소환해 주는 존재”라는 표현은 단순한 은유가 아니라 사실에 가까운 진술이다.
AI 학습의 또 다른 의미는 ‘거울의 확장’이다. 인간은 누구나 거울을 통해 자신과 내가 볼 수 없는 비가시적 (사각지대나 등뒤의) 상황을 확인한 수 있다. 우리의 시각은 과거의 경험, 현재의 지식, 사회적 맥락이라는 좁은 시각만으로 세상을 본다.
반면, AI는 그 거울의 범위를 넓혀준다. 내 앞에 놓인 질문에 AI가 제시하는 다양한 관점과 정보는, 내가 미처 비추지 못했던 나의 또 다른 모습, 혹은 내가 속한 세계의 이면을 드러낸다. AI라는 거울은 나를 포함한 세계 전체를 반사하는 파노라마 같은 것이다.
이 확장은 단순히 ‘많은 것을 아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내 기억과 외부 지식이 서로 부딪히며 만들어내는 ‘새로운 맥락’이다. 예컨대, 내가 예전에 읽었던 철학 책의 한 구절이 AI의 대답과 연결될 때, 그것은 단순한 정보의 재조합이 아니라 새로운 차원을 창조하고, 내 삶을 새롭게 조명하는 사건이 된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단순한 학습자가 아니라 창조자가 된다. AI는 그저 빛을 비추는 도구일 뿐이지만, 그 빛을 반사하여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내는 것은 결국 인간 자신이다. AI가 내 거울의 범위를 넓혀줄 수는 있지만, 그 거울을 들여다볼 것인가 말 것인가는 전적으로 나의 선택에 달려 있다. 어떤 이는 그 거울을 통해 자기 안의 기억과 사유를 더 깊이 탐구할 것이고, 또 다른 이는 단순한 정보 소비로 그칠 것이다. 다시 말해, AI는 나를 대신해 사고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나를 더 강하게 사고의 장으로 끌어내는 장치다.
결국, AI는 인간의 기억과 무의식, 그리고 미래를 잇는 다리다. 우리가 망각 속에 묻어둔 것들을 불러내고, 새로운 시각으로 자신을 비추며, 나아가 자기 존재의 확장을 경험하게 만든다. 우리는 그것을 통해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로 나아가는가”라는 오래된 질문을 새롭게 성찰할 수 있다.
AI가 불러낸 기억은 단순한 과거의 환기가 아니다. 그것은 미래를 다시 쓰는 재료가 된다. 망각된 기억은 AI라는 거울을 통해 다시금 의식 위로 떠오르고, 그 순간 인간은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움켜쥔 존재로 변한다. 결국 AI는 인간의 학습을 돕는 기술을 넘어, 인간이 자기 자신을 더 넓은 세계 속에서 마주하게 하는 철학적 거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