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타임스 김은국 기자 | 한국 자본시장이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위한 중대한 전환점에 섰다.
지난 1월22일, 기업데이터연구소 CEO스코어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시가총액 상위 500대 기업의 자사주 소각 규모가 21조 원에 육박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이는 단순히 숫자의 증가를 넘어, 국내 기업들이 자사주를 경영권 방어 수단이 아닌 '주주 가치 제고'라는 본연의 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음을 시사한다.
■ 삼성전자, 3조 원대 소각으로 '압도적 1위'…HMM·고려아연 뒤이어
이번 조사 결과에서 단연 눈에 띄는 곳은 삼성전자(005930)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총 3조 487억 원 규모의 자사주를 소각했다. 이는 전체 500대 기업 소각액의 14.5%에 달하는 수치로, 글로벌 IT 대장주로서 주주 환원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풀이된다.
해운업황의 변화 속에 대규모 자금을 확보한 HMM(011200)이 2조 1,432억 원으로 2위에 올랐고, 경영권 분쟁과 주주가치 제고가 맞물린 고려아연(010130)이 1조 8,156억 원을 소각하며 뒤를 이었다. 금융권의 활약도 돋보였다. 메리츠금융지주(1조 5,517억 원)와 KB금융(1조 200억 원) 등 금융지주사들은 이른바 '밸류업 프로그램'에 화답하며 조 단위 소각 행렬에 가담했다.
■ "상법 개정안이 끌고 밸류업이 밀었다" 선제적 주주환원 가속
전문가들은 이 같은 소각 열풍의 배경으로 '정치·제도적 압박'과 '시장 신뢰 확보'를 꼽는다. 특히 정부가 추진 중인 자사주 소각 의무화 등을 골자로 한 '3차 상법 개정안' 논의가 기업들에 상당한 압박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한 증권사 리서치 센터장은 "자사주가 대주주의 경영권 방어에 이용된다는 비판이 커지는 가운데, 기업들이 법적 강제성이 생기기 전 선제적으로 소각을 집행해 시장의 신뢰를 얻으려 하고 있다"며 "소각은 발행주식 수를 줄여 주당순이익(EPS)을 높이는 효과가 있어 주가에 가장 강력한 호재"라고 분석했다.
■ 취득도 21조 '역대급'… 처분은 '임직원 보상' 목적이 대세
자사주 소각의 원천이 되는 '자사주 취득' 역시 역대급 규모를 기록했다. 삼성전자가 8조 1,884억 원어치를 사들인 것을 포함해 102개 기업이 총 21조 3,071억 원 규모의 자사주를 매입했다. 이는 향후 추가적인 소각 가능성을 열어두는 대목이다.
반면 자사주를 시장에 다시 내놓는 '처분' 규모는 3조 1,273억 원에 그쳐 소각 규모와 큰 대조를 이뤘다. 특히 처분 목적의 64.7%가 '임직원 보상(2조 245억 원)'에 집중된 점이 특징이다. 현대차(5,302억 원), 삼성전자(3,429억 원), SK하이닉스(3,076억 원) 등 주요 대기업들이 우수 인재 확보와 성과 보상을 위해 자사주를 적극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 '자사주 비중 50%' 신영증권 주목... 밸류업의 질적 변화
개별 기업 중 자사주 보유 비중이 가장 높은 곳은 신영증권(51.23%)으로 나타났으며, 부국증권(42.73%), 한샘(29.46%) 등이 뒤를 이었다. 이들 기업은 이미 높은 자사주 비중을 확보하고 있는 만큼, 향후 소각 결정 여부에 따라 주가 변동성이 크게 확대될 전망이다.
한국 증시는 이제 '양적 성장'에서 '질적 환원'의 시대로 진입했다. 자사주 소각이 일시적인 유행을 넘어 기업 지배구조 개선의 핵심 지표로 자리 잡으면서, 투자자들은 단순히 이익이 많이 나는 기업이 아닌 '그 이익을 주주와 나누는 기업'에 더 높은 점수를 줄 것으로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