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두천 27.5℃맑음
  • 강릉 14.0℃흐림
  • 서울 26.1℃맑음
  • 대전 27.0℃맑음
  • 대구 26.5℃맑음
  • 울산 20.5℃맑음
  • 광주 25.7℃맑음
  • 부산 19.2℃맑음
  • 고창 22.1℃맑음
  • 제주 22.0℃맑음
  • 강화 22.0℃맑음
  • 보은 25.4℃맑음
  • 금산 26.2℃맑음
  • 강진군 26.0℃맑음
  • 경주시 22.0℃맑음
  • 거제 22.6℃맑음
기상청 제공

2026.04.15 (수)

[안후중 칼럼] 교황과 황제의 충돌, 그리고 호르무즈에 묶인 한국의 운명

'에픽 퓨리 작전'이 드러낸 패권의 한계와 다자주의의 부활

 

 

경제타임스 안후중 칼럼니스트 |  14세기 초, 프랑스 왕 필립 4세는 군사력을 동원해 교황 보니파시오 8세를 핍박하고 이후 일곱 명의 교황을 아비뇽(Avignon)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가톨릭 역사상 가장 굴욕적인 사건으로 기록된 '아비뇽 유수(Avignon Papacy, 幽囚, 강제 체류·연금)'는 세속 권력이 보편적 도덕 권위를 어떻게 무릎 꿇리려 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이다.

 

그로부터 700여 년이 지난 1월 22일, 미국 국방부 청사에서 한 미국 관리의 입에서 바로 그 단어가 다시 튀어나왔다. 듣는 이는 교황청 주미 대사 크리스토프 피에르(Christophe Pierre) 추기경이었다.

 

이 한 장면은 2026년 현재 워싱턴과 바티칸 사이에 흐르는 기류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트럼프 행정부의 압도적 군사력과 교황 레오 14세(Leo XIV)의 도덕적 권위가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다. 그리고 그 충돌의 파편은 멀리 한반도까지 날아와, 호르무즈(Hormuz) 해협에 산업의 명줄을 걸어둔 한국 경제의 가장 약한 부위에 박혔다.

 

■ 최초의 미국인 교황, '도덕적 방패막이'를 거부하다

 

지난해 5월 콘클라베를 통해 선출된 제267대 교황 레오 14세, 본명 로버트 프랜시스 프리보스트(Robert Francis Prevost)는 시카고 출신으로 페루에서 20여 년간 선교한 역사상 최초의 미국 시민권자 교황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자국 출신 교황의 등장을 반기며 백악관 대외정책의 도덕적 엄호를 기대했다. 그러나 이 기대는 오래 가지 못했다.

 

레오 14세는 지난 1월9일 교황청 주재 외교관들을 대상으로 한 '국정 연설(State of the World)'에서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City of God)'을 인용하며 "대화와 합의를 촉진하는 외교가 개인이나 동맹 그룹의 무력에 기반한 외교로 대체되고 있다"고 일갈했다. 그는 "전쟁이 다시 유행하고 있으며, 제국주의적 점령과 글로벌 패권 추구가 횡행하고 있다"고 직격했다. 누구를 겨냥한 발언인지 워싱턴은 즉각 알아챘다.

 

엘브리지 콜비(Elbridge Colby) 미 국방부 정책차관이 피에르 추기경을 국무부도 백악관도 아닌 펜타곤(Pentagon)으로 비공개 소환한 것은 그로부터 13일 뒤였다. 종교 지도자를 국방부로 부른 것 자체가 외교적 관례의 파괴였다. 그 자리에서 콜비 차관과 고위 관리들은 "미국은 전 세계에서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가톨릭 교회는 미국 편에 서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경고했다고 한다. 그리고 누군가의 입에서 '아비뇽 유수'라는 단어가 흘러나왔다.

 

■ 람페두사로 향한 교황의 발걸음

 

교황의 응답은 침묵이 아니라 거절이었다. 바티칸은 7월 4일 미국 독립 250주년 기념식 참석 요청을 일축했고, 계획됐던 방미 일정을 전면 취소했다. 대신 레오 14세는 그날 북아프리카 난민들이 목숨을 걸고 유럽으로 건너오는 관문, 이탈리아 남부의 작은 섬 람페두사(Lampedusa)를 찾기로 했다.

 

세속 패권국의 화려한 기념식 대신 익사 위험에 노출된 이주민들의 곁에 서겠다는 선택. 이것은 단순한 외교적 거절이 아니라 21세기형 도덕적 항거다. 백악관 부대변인 애나 켈리(Anna Kelly) 등은 펜타곤 회동에 대한 보도가 과장됐다고 부인했지만, 균열을 부정한다고 균열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 '에픽 퓨리'와 미나브 초등학교의 156명

 

워싱턴-바티칸 갈등이 도덕 논쟁이라면, 그 도덕 논쟁의 잔혹한 물증은 이란 남부의 한 초등학교에 있다. 2월28일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 최고 지도자 알리 하메네이(Ali Khamenei)를 암살하며 개시한 '에픽 퓨리 작전(Operation Epic Fury, 장대한 규모의 맹렬한 공격)'의 첫날, 미군의 토마호크(Tomahawk) 미사일이 미나브(Minab) 초등학교를 직격했다. 어린 학생 156명이 사망하고 95명이 중상을 입었다.

 

피트 헤그세스(Pete Hegseth) 미 국방장관은 38일간 1만 200회 이상의 항공 출격으로 이란 해군의 90%를 침몰시키고 1만 3000개 이상의 표적을 타격했다며 승리를 선언했다. 그러나 헤그세스 장관이 부활절 주말 이란에서 구출된 미군 조종사를 두고 "성금요일에 격추돼 동굴에 숨었다가 부활절 주일 아침 해가 뜰 때 구출됐다"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직접 비유하고 "신은 위대하다(God is good)"고 선언했을 때, 이 전쟁은 이미 단순한 군사 작전을 넘어 어떤 종교적 광기의 영역에 들어서 있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4월 초 호르무즈 봉쇄 이란을 향해 "이란 문명 전체가 오늘 밤 소멸할 것(a whole civilization will die tonight)"이라며 민간 인프라 전면 파괴를 예고했을 때, 인내의 임계점은 마침내 무너졌다.

 

■ "하느님은 어떤 전쟁도 축복하지 않는다"

 

레오 14세의 반격은 외교적 수사의 옷을 벗은 채였다. 교황은 트럼프의 발언을 "참으로 용납할 수 없는 일(truly unacceptable)"이라 규탄했고, 4월 11일 성 베드로 대성당의 평화 기원 기도회에서는 전쟁을 주도하는 세력의 심리를 "전능에 대한 망상(delusion of omnipotence)"이라 직격했다. "자아와 돈에 대한 우상숭배는 이제 그만! 권력의 과시는 이제 그만! 전쟁은 이제 그만!"이라는 외침이 광장을 울렸다.

 

엑스(X) 계정에서 그는 한 발 더 나아갔다. "하느님은 어떤 전쟁도 축복하지 않는다(God does not bless any conflict)." 살아 있는 하느님의 이름을 죽음과 파괴를 정당화하는 논리에 끌어들이는 것은 명백한 "신성모독(blasphemy)"이라는 단언이었다.

 

워싱턴 교구의 로버트 맥엘로이(Robert McElroy) 추기경은 이 전쟁이 가톨릭의 '정의로운 전쟁(Just War)' 교리의 세 축인 '정당한 명분', '올바른 의도', '비례성의 원칙'을 모두 위반했다고 못 박았다. 시카고의 블레이즈 수피치(Blase Cupich) 추기경은 백악관이 유포한 전쟁 선전 영상을 두고 "실제 죽음과 고통이 따르는 전쟁을 구경거리로 전락시킨 구역질 나는 일(sickening)"이라고 비난했다.

 

여론은 정직하다. NBC 뉴스가 3월에 실시한 전국 등록 유권자 1000명 대상 조사에서 레오 14세는 긍정 42%·부정 8%로 순 호감도 +34를 기록하며 모든 공인 가운데 압도적 1위에 올랐다. 트럼프 대통령은 부정 53%로 순호감도 -12에 머물렀다. 퓨 리서치 센터(Pew Research Center) 1월 조사에서 백인 가톨릭계의 트럼프 정책 지지율은 51%에서 46%로, 백인 복음주의 개신교는 66%에서 58%로 떨어졌다. 도덕적 방패막이를 기대했던 자리에 균열이 가고 있는 것이다.

 

■ 한국의 자리, 한국의 셈법

 

여기까지가 워싱턴과 바티칸의 이야기라면, 이제부터는 우리의 이야기다. 이 전쟁의 가장 가혹한 청구서는 비(非)교전국 가운데 한국 앞으로 날아왔다.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가 4월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은 원유의 70%, 헬륨(Helium)의 64.7%, 나프타(Naphtha)의 35%, LNG의 19.5%를 호르무즈 해협 경유 물량에 의존해 왔다. 정부가 단독 통제하는 비축유 1억10만 배럴은 일일 정유 처리량 290만 배럴 기준 34일분에 불과하고, IEA 공조에 2250만 배럴을 내놓은 뒤로는 실질 가용일수가 26일로 쪼그라들었다. 아랍에미리트(UAE)에서 긴급 조달한 2400만 배럴이 8~9일치를 더 벌어준 것이 전부다.

 

그러나 정작 두려운 것은 원유가 아니다. 헬륨이다. 반도체 EUV 노광 공정의 열 관리와 오염 제어, 대용량 하드드라이브 밀봉에 필수적인 이 가스는 대체재가 없다. 한국이 64.7%를 의존해 온 카타르 라스 라판(Ras Laffan) 산업단지가 이란의 공격으로 멈춰 섰고, 호르무즈 봉쇄로 수출길마저 닫혔다. 국내 6개월치 비축분이 소진되는 순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칩 수율은 추락하고 결함률은 치솟을 것이다. 국제 헬륨 가격은 이미 40% 이상 뛰었다.

 

코스피(KOSPI)는 43년 만의 최악의 일일 낙폭을 기록했고, 원/달러 환율은 17년 만의 최저치로 내려앉았다. 페르시아만 일대에는 한국 국적 선박 26척과 선원 173명이 발이 묶여 있다. 이재명 정부는 170억 달러 규모의 추가경정예산과 원전 재가동 앞당기기, 미국으로부터 받아낸 30일간의 러시아산 원유 수입 한시 제재 면제 등으로 사방을 막아내고 있지만, 이것은 응급처치이지 치료가 아니다.

 

외교부는 "모든 당사자의 긴장 완화"를 촉구했고, 국방부 국제평화협력과는 청해부대 임무 지역의 호르무즈 확대 가능성에 "미국 측으로부터 어떠한 요청도 받은 바 없다"며 선을 그었다. 신중한 줄타기다. 그러나 이재명 대통령이 엑스 계정에 이스라엘 방위군(IDF) 관련 영상을 공유하며 "위안부나 홀로코스트와 같이 우리가 규탄해 온 전시 살인과 다를 바 없다"고 논평했을 때, 그 줄타기는 한 번 흔들렸다. 이스라엘 외무부의 강력 항의에 외교부가 진화에 나서야 했다.

 

■ 패권의 한계 앞에서, 다자주의의 자리를 다시 짓자

 

조지타운 대학교와 마나라 매거진(Manara Magazine)의 분석은 냉정하다. '에픽 퓨리 작전'은 무력 면에서는 압도적이었으나, 트럼프가 내건 '정권 교체'도 이스라엘이 원한 '존재론적 위협 제거'도 달성하지 못했다. 알리 하메네이 제거 후에도 이란 체제는 모즈타바 하메네이(Mojtaba Khamenei)를 중심으로 신속히 재정비됐고, 호르무즈 봉쇄라는 '관리된 불안정성(managed instability)'을 새로운 억지력으로 손에 쥐었다. 페르시아만의 동맹국들은 미국 안보 우산의 한계를 체감했다.

 

바티칸 국무원장 피에트로 파롤린(Pietro Parolin) 추기경의 경고는 예언처럼 들린다. 예방 전쟁의 논리가 용인되면 국제법 체계는 붕괴하고, 세계는 물리적 힘만이 지배하는 위험한 다극 체제로 전락한다. 이슬라마바드(Islamabad)에서 4월 11일 시작된 미국-이란 평화 협상은 핵 폐기 요구와 자산 동결 해제 요구가 맞부딪치며 시작부터 삐걱이고 있다. 4월 22일 휴전 만료 이후의 풍경은 누구도 자신할 수 없다.

 

이 모든 풍경 앞에서 한국은 한 가지 단순한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미국의 군사적 억지력에 무비판적으로 편승하는 단선적 외교 공식은 이미 그 효용 기한을 넘어섰다. 펜타곤이 '아비뇽 유수'를 들먹이며 교황을 협박하는 시대에, 동맹의 비용은 점점 비싸지고 동맹의 보증은 점점 흐릿해지고 있다.

 

해법의 방향은 두 갈래다. 하나는 교황청이 일관되게 촉구해 온 다자주의적 대화와 국제법 존중의 가치를 우리 외교의 지렛대로 적극 끌어들이는 일이다. 한국은 미국의 동맹이지만 동시에 중견국이며, 중견국의 몫은 강대국의 폭주를 견제하는 도덕적·법적 언어를 잃지 않는 데 있다. 또 하나는 헬륨과 나프타로 상징되는 첨단 산업 생명선을 특정 해협, 특정 국가에 묶어 둔 구조 자체를 해체하는 일이다. 이것은 산업통상부 한 부처의 과제가 아니라 안보의 과제다.

 

700년 전 아비뇽으로 끌려간 교황들은 결국 로마로 돌아왔다. 권력은 도덕을 굴복시킬 수 있다고 믿었지만, 역사는 그 반대를 기록했다. 2026년 봄, 미나브 초등학교의 156명과 람페두사로 향한 한 노인의 발걸음을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단지 남의 비극이거나 남의 용기여서가 아니다. 호르무즈에 묶인 우리의 운명이, 결국 그 두 장면 사이 어디쯤에서 결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같은 섹션 기사

더보기




공시 By AI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