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타임스 안후중 칼럼니스트 | 2월5일, 재정경제부가 발표한 30억 달러 규모 외평채(외국환평형기금채권, Foreign Exchange Stabilization Fund Bond, 환율 안정 및 외환시장 안정을 위한 정부의 외화·원화 표시 채권) 발행 결과를 보며 한국 금융 역사의 새로운 장이 열렸음을 실감했다.
3년물 가산금리 9bp(9basis point=0.09%p), 5년물 12bp(12basis point=0.12%p). 미국 국채 대비 이 정도 수준이면 사실상 한국 정부의 신용도를 글로벌 시장이 최고 등급으로 인정한 셈이다.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높은 비용을 감수하며 외화를 끌어모으던 모습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따로 없다.
더 주목할 대목은 발행 방식이다. SSA(Sovereigns Supranationals and Agencies, 글로벌 국채·준국채 발행) 방식으로 각국 중앙은행과 국제기구를 타깃으로 삼았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같은 시기 아시아개발은행이 10년물을 9.2bp에 발행한 것과 비교하면, 한국 정부 채권이 국제기구 채권과 동급 대우를 받고 있다는 뜻이다. '신흥국 코리아'가 아닌 '선진 금융국 코리아'로의 전환, 그 상징적 순간이었다.
■ 반도체가 만든 기회, 제도가 잡은 신뢰
물론 이 성과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은 아니다. 배경에는 두 가지 강력한 동인이 있다. 하나는 반도체 슈퍼사이클이다. 1월 수출이 전년 대비 33.9% 증가하며 658억 달러를 기록했고, 그중 반도체가 205억 달러로 무려 102.7% 급증했다. AI 서버 수요 폭발과 HBM 같은 고부가가치 제품 확대가 만들어낸 결과다. 한국은행은 올해 경상수지 흑자가 1천300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전망한다.
그러나 단순히 수출이 잘된다고 국채 가산금리가 9bp까지 떨어지지는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제도적 신뢰다. 상법 개정을 통해 이사의 충실 의무를 '주주'에게까지 확대한 것, 영어 공시 의무화와 감사위원 분리 선출 강화,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을 통한 주주 환원 확대. 이런 변화들이 글로벌 투자자들에게 '한국은 이제 다르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실제로 2025 회계연도 국내 기업 배당 성향은 39%로 전년 대비 3%포인트 올랐고, 자사주 매입과 소각도 활발해졌다. 그 결과 한국의 CDS 프리미엄(Credit Default Swap Premium, 한국 국채의 신용위험을 보장하는 비용)은 20bp(0.20%p) 초반대로 사상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한국 경제에 대한 시장의 신뢰가 구조적으로 높아진 것이다
■ 재정경제부 부활의 상징성
이번 발행은 1월2일 출범한 재정경제부가 주도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18년 만에 기획재정부를 재정경제부와 기획예산처로 쪼갠 것은 단순한 명칭 변경이 아니다. 경제 정책 실행은 재정경제부가, 중장기 전략과 예산 배분은 기획예산처가 맡는 '따로 또 같이' 모델이다.
조직 개편 직후 첫 대외 성과가 이렇게 화려하게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새로운 체계가 작동하고 있다는 신호다. 재정경제부 국제금융국은 지난해 말부터 그룹콜과 화상회의로 전 세계 투자자들을 상대로 한국 경제의 강점을 설파했다. 반도체와 자동차는 물론이고 K-컬처, AI 기술력, 자본시장 개혁까지. 그 결과 사상 최대 청약 배수를 기록하며 시장의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냈다.
■ WGBI 편입, 마지막 퍼즐
4월부터 시작되는 WGBI(World Government Bond Index, 세계국채지수) 편입은 한국 국채 시장의 '최종 관문'이다. 8개월에 걸쳐 단계적으로 진행되며, 지수 내 비중은 약 2.08%로 26개국 중 9위 수준이다. 예상 자금 유입액만 500억~600억 달러에 달한다.
이를 위해 정부는 외환시장 개방, 거래 시간 연장, 외국인 투자자 등록제 폐지 등 인프라를 대대적으로 정비했다. 올해부터 원화 24시간 실시간 결제망이 가동되면서 해외 투자자들의 원화 자산 접근성은 비약적으로 향상됐다. 이번 외평채 발행 때 투자자들이 보여준 신뢰는 바로 이런 제도적 기반 위에서 나온 것이다.
WGBI 편입이 완료되면 한국 국채는 명실상부한 '글로벌 안전자산'으로 인정받게 된다. 조달 비용은 구조적으로 낮아지고, 국내 기업들의 해외 자금 조달도 훨씬 유리해진다. 외환 방어 체계도 한층 단단해진다. 외환보유액 4280억 달러에 NPS의 외화채 발행까지 더해지면 환율 변동성에 대응할 수 있는 카드가 그만큼 늘어나는 셈이다.
■ 그러나 장밋빛 전망만은 아니다
냉정하게 봐야 할 대목도 있다. 트럼프 2기 정부의 자국 우선주의와 25% 보복 관세 위협은 여전히 현실적 리스크다. 타코 협정으로 10년간 3500억 달러 투자를 약속했지만, 트럼프의 불만은 가시지 않았다. 현대차, 한화오션, 고려아연 등이 미국 내 투자를 속도감 있게 진행하고 있지만, 정치적 변수를 완전히 통제할 수는 없다.
북핵 문제도 마찬가지다. 트럼프-김정은 3차 회담 가능성이 거론되지만, 북한은 1월 말 탄도 미사일을 쏘며 긴장을 높였다. 이재명 정부가 한미 동맹을 기반으로 실용 외교를 펼치고 있지만, 지정학적 리스크는 언제든 터질 수 있는 뇌관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인구 구조다. 저출산·고령화로 인한 잠재 성장률 하락은 장기 과제다. 반도체 슈퍼사이클이 영원할 수는 없고, 자동차와 조선도 글로벌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진다. 지금의 호황을 구조적 성장 기반으로 전환하지 못하면 외평채 가산금리는 언제든 다시 올라갈 수 있다.
■ 코리아 프리미엄, 지속 가능하려면
9bp(9basis point=0.09%p)라는 숫자는 한국 경제가 이룬 성취를 보여주지만, 동시에 앞으로 지켜야 할 책임이기도 하다. 코리아 프리미엄을 일회성 이벤트가 아닌 지속 가능한 구조로 만들려면 몇 가지 과제가 남아 있다.
첫째, 기업 지배구조 개혁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상법 개정은 시작일 뿐이다. 소액 주주 권리 보호가 실질적으로 작동하는지, 기업들이 진정성 있게 주주 환원을 늘리는지 지켜봐야 한다. 제도는 만들었지만, 문화가 바뀌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둘째, 디지털 금융 혁신을 가속화해야 한다. 스테이블코인 규제, 가상자산 ETF(Exchange Traded Fund, 상장지스펀드) 허용, CBDC(Central Bank Digital Currency, 중앙은행 디지털화폐) 확대 등은 방향은 맞지만 속도가 중요하다. 글로벌 테크 자금을 끌어들이려면 규제 명확성과 시장 자율성의 균형을 잘 맞춰야 한다.
셋째, NPS(National Pension Service, 국민연금공단)의 외화채 발행을 성공적으로 안착시켜야 한다. 올해 말 예정된 첫 발행이 순조롭게 진행되면 외환 시장 안정과 투자 다변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 보건복지부, 국민연금, 재정경제부, 한국은행의 4자 협의체가 얼마나 긴밀하게 움직이느냐가 관건이다.
넷째, 통상 마찰에 전략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트럼프 정부의 압박을 단순히 견디는 게 아니라, 한국 기업들의 미국 투자가 양국 모두에 이익이 된다는 점을 지속적으로 설득해야 한다. 상업적 합리성을 증명하는 것이 최선의 방어다.
■ 세계가 보는 한국, 한국이 보는 세계
2026년 2월5일은 기억될 날이다. 한국 국채가 '위험 자산'에서 '안전자산'으로 완전히 탈바꿈한 날. 재정경제부가 부활한 지 한 달여 만에 금융 외교 첫 승을 거둔 날.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코리아 프리미엄으로 전환되기 시작한 날.
그러나 이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세계 금융시장은 이제 한국을 신흥국이 아닌 선진국의 기준으로 본다. 그만큼 요구 수준도 높아졌다. 투명성, 예측 가능성, 지속 가능성. 이 세 가지를 계속 증명해야 한다.
한국 경제는 지난 수십 년간 위기를 기회로 바꿔왔다. 1997년 외환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2020년 팬데믹. 매번 더 강하게 일어섰다. 2026년은 '대도약의 원년'이 될 수 있다. 반도체 슈퍼사이클이라는 바람, 제도 개혁이라는 돛, WGBI 편입이라는 항로. 조건은 갖춰졌다.
이제 남은 것은 항해를 지속하는 것이다. 9bp라는 숫자가 한때의 기록이 아니라 새로운 기준이 되도록, 코리아 프리미엄이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구조적 현실이 되도록. 재정경제부와 기획예산처, 한국은행, NPS(National Pension Service, 국민연금공단)가 한 팀으로 움직이고, 기업들이 글로벌 스탠더드를 체화하며, 정부가 지정학적 리스크를 현명하게 관리한다면, 우리는 이 항해를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을 것이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숫자를 만드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 2026년 2월5일의 성과를 2027년, 2028년에도 이어갈 수 있을지는 우리가 지금부터 무엇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