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타임스 김은국 기자 | 전기차(EV) 시장의 일시적 수요 정체기를 뜻하는 ‘캐즘(Chasm)’의 파고가 이제는 단순한 실적 둔화를 넘어 국내 배터리 산업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수주 잭팟’으로 불리던 수십조 원 규모의 공급 계약들이 종이조각으로 변하고 있으며, 굳건했던 완성차 업체(OEM)와의 동맹 관계도 실리 앞에서 빠르게 해체되는 양상이다.
■ 열흘 새 13조 ‘공중분해’…LG엔솔에 닥친 수주의 배신
국내 배터리 업계 1위인 LG에너지솔루션의 최근 행보는 현재 시장이 처한 냉혹한 현실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LG에너지솔루션은 최근 열흘 사이 약 13조 5000억 원에 달하는 대규모 공급 계약 해지를 공시했다.
지난 12월17일, 미국 포드(Ford)와 맺었던 9조6000억 원 규모의 계약이 무산된 데 이어, 26일에는 미국에 기반을 둔 맞춤형 리튬이온 배터리팩 제조사 FBPS(S(Flexible Battery Pack Solutions)와의 3조9217억 원 규모 모듈 공급 건마저 취소됐다. 포드는 전동화 속도 조절을 위해 전략을 수정했고, FBPS는 전기차 수요 급감으로 아예 배터리 사업에서 철수하기로 했다. 거대한 수주 잔고가 한순간에 사라지는 ‘수주의 역설’이 현실화된 것이다.
최소 구매 물량 미달에 따른 보상금 협의가 진행될 예정이지만, 이는 단기적인 손실 보전에 불과하다. 장기적인 생산 라인 가동률 저하와 유휴 설비 유지 비용은 고스란히 배터리 제조사의 몫으로 남게 됐다.
■ 소재 업계는 ‘생존 위기’…엘앤에프 3.8조 계약이 ‘973만원’으로
배터리 셀 제조사의 타격은 곧바로 소재 업계의 ‘생존 위협’으로 전이되고 있다. 양극재 전문 기업 엘앤에프의 최근 공시는 업계에 큰 충격을 안겼다. 테슬라와 체결했던 3조 8347억 원 규모의 양극재 공급 계약 금액이 단돈 ‘973만 원’으로 감액된 것이다.
사실상 계약 파기나 다름없는 이번 사태는 전기차 벨류체인 하단으로 갈수록 충격파가 더 커진다는 것을 방증한다. 배터리 셀 제조사가 가동을 멈추면 소재 업체는 재고 부담과 매출 급감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한다. 업계에서는 다른 소재·부품사들 역시 유사한 상황에 직면해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 갈라서는 ‘배터리 동맹’…합작법인(JV)의 각자도생
전기차 시장 선점을 위해 분주하게 맺어졌던 완성차-배터리 간 ‘합종연횡’도 원점으로 돌아가고 있다. SK온은 포드와 세운 합작법인 ‘블루오벌SK’의 운영 구조를 사실상 해체했다. 켄터키 공장은 포드가, 테네시 공장은 SK온이 각자 운영하기로 하며 ‘혈맹’ 관계에서 ‘단순 협력’으로 후퇴했다.
LG에너지솔루션 또한 혼다와의 합작사 공장 건물을 혼다 미국 법인에 약 4조원을 받고 매각했다. 유동성 확보를 위한 고육지책이지만, 한때 전기차 영토 확장의 전초기지였던 합작 공장이 이제는 처분 대상이 된 모양새다.
■ “내년 성장은 반토막”…멈춰버린 신규 설비 투자
전략 수정의 배경에는 처참한 시장 데이터가 있다. 자동차 시장 데이터 분석업체 콕스오토모티브에 따르면 미국은 전기차 보조금 폐지 직후 판매량이 48.9% 급감했다. 글로벌 전기차 시장조사업체 EV볼륨스(EV-Volumes)는 글로벌 전기차 판매 성장률이 올해 24.5%에서 내년 13.4%로 반토막 날 것으로 전망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신규 투자도 올스톱 상태다. SK온-닛산 계약은 생산라인 구축이 1년 연기됐고, 삼성SDI-스텔란티스 합작 2공장 역시 불투명한 상태다. 삼성SDI는 이미 1공장의 용도를 전기차용에서 ESS(에너지저장장치)용으로 전환하며 ‘플랜 B’ 가동에 들어갔다. GM과의 합작공장 장비 발주 역시 기약 없이 미뤄지고 있다.
■ “버티기 돌입, 포트폴리오 다각화가 유일한 출구”
업계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를 단순한 침체가 아닌 ‘구조적 재편’으로 보고 있다. 한 배터리 전문 애널리스트는 “완성차 업체들이 내연기관과 하이브리드로 회군하면서 배터리 업계에 가해지는 압박은 내년에 정점에 달할 것”이라며 “이제는 외형 성장보다 ESS(Energy Storage System) 등 비(非)전기차 부문으로의 매출 다각화와 공정 효율화를 통한 비용 절감이 기업의 생존을 결정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