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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디자이너 프랑스 피에르 카르댕 사망 - 향년 98세, 김학준 기자 2020-12-30 14:42:19

피에르 카르댕은 능숙한 사업 감각으로, 라벨에 있는 이름의 매력을 인식하게 되었고, 선글라스에서 향수, 펜, 그리고 음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상품들에 그의 이름이 쓰이도록 허락했다. 그러나 일부에게는 그러한 확대가 그의 핵심 사업의 매력을 약화시켰다는 평가도 있다(사진 : 피에르 가르댕 공식 인스타그램 캡처)

 

프랑스를 대표하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디자이너 피에르 가르댕(Pierre Cardin)이 29일(현지 시간) 프랑스 파리의 한 병원에서 사망했다고 BBC방송이 30일 보도했다. 향년 98세. 

 

AFP통신 보도에 따르면, 파리 근교의 뇌이(Neuilly)에 있는 병원에서 사망했다. ‘뇌이’는 1919년 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 연합군과 불가리아 간의 강화 조약의 체결한 곳이기도 하다. 

 

특히 피에르 가르댕 본인의 으름을 딴 브랜드는 세계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1922년 이탈리아 북부에서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당시 이탈리아의 파시즘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족과 함께 프랑스로 이주했다. 14세 때 재봉의 일을 배우는 등 수업을 쌓은 후 저명한 패션 디자이너 고(故) 크리스챤 디오르의 아래에서 일을 했다. 

 

70년 이상 경력을 쌓은 이 프랑스 패션 거인은 현대 스타일로 전후 쿠튀르(couture)의 “황금시대”를 알리는 데 일조했다. 그는 최초의 기성복 컬렉션 중 일부와 함께 디자이너 스타일을 대중들에게 선보임으로써 기반을 다졌으며, 사업 선구자인 그는 또 광범위한 제품에 대한 자신의 이름을 허가했다.

 

50년에 파리에서 자신의 고급 주문복의 가게를 열어, 평가를 높였다. “많은 사람에게 작품을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며 파리 백화점 플랑탕에 자신의 옷을 두는 프레타포르테(고급 기성복)의 길을 열었다.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대응으로 동업자에게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일부 사람만의 것이었던 고급 패션을 ‘민주화’했다는 평가도 있다. 참신한 감성을 지닌 디자이너로 60년대에는 처음으로 비닐을 옷 소재로 사용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그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패션계는 프랑스의 동료 디자이너 장 폴 고티에가(ean-Paul Gaultier)는 그에게 “패션의 문을 열고, 내 꿈을 실현시켜 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면서 찬사를 보냈고, 엘르 매거진 편집장과 프로젝트 런웨이의 니나 가르시아(Nina Garcia) 심판은 피에르 가르댕의 디자인은 “패션이 어떻게 미래를 설계할 힘을 가지고 있는지 보여주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썼다 : “그의 호기심, 비전과 패션 예술에 대한 그의 사랑은 20세기 후반 많은 여성들의 꿈을 형성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오늘날에도 그의 디자인은 실루엣과 천으로 많은 현대 디자이너들에게 영감을 주었다”고 술회했다. 

 

BBC는 피에르 가르댕의 디자인은 “60년대 우주시대의 패션‘이라며 극찬했다. 

 

베넷톤 예술 감독 장 샤를 드 카스텔바작(Jean-Charles de Castelbajac)은 “가르댕은 패션, 디자인, 건축 사이에 경계를 두지 않은 매우 특별한 사람”이라면서, “그의 영감이 나의 상상력을 북돋았다”며, “카르댕에게는 자신의 예술의 마케팅과 홍보가 예술 자체만큼이나 중요하다”고 말했다고 AFP통신은 전했다. 

 

사진작가이자 전직 모델인 나이젤 바커(Nigel Barker)는 트위터를 통해 “우리는 전설 하나를 잃었다. 패션 디자이너 피에르 카르댕은 자신의 미래지향적인 디자인과 고정관념을 벗어난 사고방식으로 업계에 혁명을 일으켰다.”고 말했다. 

 

피에르 카르댕은 1950년에 자신만의 패션 회사를 설립했고, 1954년의 상징적인 버블 드레스와 1964년의 우주 시대 컬렉션과 같은 공상적인 디자인으로 이름을 날렸다.

 

1950년대 말 그는 프린템프(Printemps) 백화점을 위한 그의 첫 기성복 컬렉션을 출시했다. 비틀즈나 로렌 바콜(Beatles and Lauren Bacall) 같은 팝 스타들과 배우들이 카르댕을 입고 있는 것이 목격된 것은 물론이고 동시에 그의 최신 디자인도 일반 고객들과 접촉할 수 있었다.

 

그는 능숙한 사업 감각으로, 라벨에 있는 이름의 매력을 인식하게 되었고, 선글라스에서 향수, 펜, 그리고 음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상품들에 그의 이름이 쓰이도록 허락했다. 그러나 일부에게는 그러한 확대가 그의 핵심 사업의 매력을 약화시켰다는 평가도 있다. 

 

하퍼 바자(Harper's Bazaar) 잡지의 편집국장인 저스틴 피카르디(Justine Picardie)는 BBC 라디오 4의 “The World At One”에서 “그는 넥타이와 펜에서 자동차에 이르기까지 모든 세계적인 라이선스 거래와 동의어가 됐으며, 패션의 대중화와 민주화, 그리고 우주 시대의 아이디어와도 동의어였다.”고 평가했다. 

 

카르댕은 또 1979년 중국 공산당과 1991년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서 소장품을 선보이며 새로운 세계화된 세계 시장을 목표로 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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