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타임스 김은국 기자 | "엔비디아가 두뇌를 설계하면, SK는 그 기억을 만듭니다. 엔비디아가 번개처럼 빠르게 생각할 때, SK는 그 기억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보존되도록 뒷받침합니다."
인공지능(AI) 혁명의 최전선에서 글로벌 반도체 지형을 뒤흔들고 있는 두 거물이 미국 뉴욕 한복판에서 굳건한 '기술 혈맹'을 확인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9월28일(현지시간) '코리아소사이어티 2026 연례 만찬(Gala)'에서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를 향해 건넨 헌사다.
비즈니스 제휴 협력 관계를 넘어, 70여년간 이어져 온 한미동맹의 핵심 무대가 이제 전장에서 글로벌 AI 데이터센터와 첨단 실리콘 밸류체인으로 전면 이동했음을 상징하는 선언으로 풀이된다.
■ 밴 플리트 상으로 이어진 인연…'군사 동맹'에서 'AI 첨단 동맹'으로
이번 행사의 주인공은 한미 친선에 기여한 공로로 '2026 밴 플리트 상(Van Fleet Award)'을 수상한 젠슨 황 CEO였다. 밴 플리트 상은 한국전쟁 당시 미 8군 사령관으로 참전했던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상이다. 최태원 회장 본인은 물론 선친인 고(故) 최종현 선대회장까지 부자(父子)가 모두 이 상을 받은 각별한 인연을 지니고 있다.
이날 만찬의 공식 건배사를 맡은 최 회장은 밴 플리트 장군의 유산을 소환하며 양국 협력의 패러다임 전환을 짚었다. 과거 포화 속에서 피로 맺어졌던 안보·통상 중심의 한미동맹이 21세기 디지털 문명기에는 AI 인프라를 지탱하는 '기술 안보 동맹'으로 확장·진화했다는 통찰이다.
최 회장은 "70여년 전 밴 플리트 장군이 구축했던 동맹의 전선이 오늘날에는 AI 데이터센터라는 새로운 최전선으로 옮겨왔다"고 진단했다. 이어 "특유의 검은색 가죽 재킷을 입은 젠슨 황 CEO가 첨단 기술 진격을 선두에서 이끌고 있다"며 황 CEO의 리더십에 깊은 경의를 표했다.
■ "두뇌와 기억의 결합"…HBM 패권이 증명한 공생 공식
이날 최 회장이 설파한 '두뇌(GPU)와 기억(HBM)'의 비유는 반도체 엔지니어링의 본질과 두 회사의 독점적 공생 구조를 가장 직관적으로 규명한 표현으로 평가받는다.
초거대 언어모델(LLM)과 생성형 AI 연산의 핵심인 엔비디아 그래픽처리장치(GPU)는 인간의 뇌처럼 방대한 데이터를 병렬로 초고속 연산한다. 하지만 이 강력한 연산 장치도 데이터를 제때 퍼 나르고 안전하게 담아낼 초고대역폭메모리(HBM)가 없으면 극심한 병목현상(Data Bottleneck)에 빠져 멈춰 설 수밖에 없다.
최 회장이 "엔비디아가 번개처럼 빠르게 생각하면 SK는 그 기억이 유실되지 않도록 보장한다"고 밝힌 배경이다. 엔비디아의 블랙웰(Blackwell) 등 차세대 AI 가속기 아키텍처에 SK하이닉스의 독점적 HBM 공급망이 반드시 결합해야만 완전한 AI 시스템이 작동한다는 점을 명확히 한 셈이다.
아울러 최 회장은 황 CEO의 유명한 어록인 "The more you buy, the more you save(많이 살수록 더 많이 아낀다)"를 건배사에서 직접 인용해 장내의 큰 호응을 이끌어냈다. 엔비디아 가속기를 대거 도입할수록 데이터센터 전력과 공간 효율성이 극대화되어 총소유비용(TCO)이 절감된다는 황 CEO의 지론을 치켜세우는 동시에, 그 효율의 기반에 SK의 초저전력·고성능 메모리가 자리하고 있음을 은연중에 시사한 유쾌한 화답이었다.
■ 3분기 실적 전망 '경천동지'…글로벌 AI 특수가 빚은 어닝 서프라이즈
이 같은 끈끈한 'AI 실리콘 동맹'은 실적이라는 숫자로 가감 없이 입증되고 있다. 생성형 AI 인프라 투자 광풍 속에서 HBM 수요가 폭발하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K-반도체 기업들은 올해 3분기 일제히 사상 최대 실적을 갈아치울 태세다.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SK하이닉스의 2026년 3분기 연결기준 실적 컨센서스(증권사 전망치 평균)는 매출 99조3941억원, 영업이익 78조577억원에 달한다.
이 같은 전망치가 현실화될 경우 SK하이닉스는 전년 동기 대비 매출은 306.5%, 영업이익은 무려 585.7% 폭증이라는 기록적인 성적표를 받아들게 된다.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의 AI 데이터센터 건립 레이스가 가속화되면서 HBM 5세대(HBM3E) 8단 및 12단 제품을 사실상 독점 공급해 온 프리미엄 효과가 고스란히 영업이익률로 반영된 결과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과거 메모리 시장이 PC와 스마트폰 출하량에 좌우되는 '사이클 산업'에 머물렀다면, 지금의 HBM은 엔비디아 GPU 설계 단계부터 긴밀히 맞물려 돌아가는 '맞춤형 커스텀 산업'으로 체질을 바꿨다"며 "뉴욕 만찬에서 확인된 최 회장과 황 CEO의 신뢰는 향후 차세대 HBM4 및 커스텀 AI 칩 생태계에서도 양사의 결속이 흔들림 없이 이어질 것임을 예고하는 신호탄"이라고 평가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