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타임스 김은국 기자 | 인공지능(AI) 혁명의 무게중심이 거대언어모델(LLM) 알고리즘 개발을 넘어, 이를 떠받치는 물리적 토대인 ‘하이퍼스케일 데이터센터’로 급속히 이동하고 있다. 무한대로 치솟는 연산 수요와 이를 뒷받침할 전력 수급, 상상을 초월하는 발열 해소 문제가 글로벌 AI 산업의 생사를 가르는 핵심 병목으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산업 대전환의 분수령에서 삼성이 하드웨어 납품업체(Vendor)의 틀을 깨고 글로벌 AI 인프라 판도를 직접 짜는 ‘설계자(Architect)’로 전격 등판했다. 삼성전자, 삼성물산, 삼성SDS, 삼성SDI, 삼성생명, 삼성화재 등 삼성의 핵심 제조·IT·금융 6개 관계사가 글로벌 대체투자 거두 KKR이 설립한 AI 인프라 전담 기업에 총 10억 달러(약 1조 3000억원) 규모의 창립 투자를 단행한 것이다.
지분 투자를 넘어,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반도체부터 액체냉각, 에너지 저장, 엔지니어링 및 건설(EPC)까지 일괄 공급할 수 있는 ‘삼성 풀스택 밸류체인’을 글로벌 표준 플랫폼에 직결하겠다는 승부수다.
■ ‘클라우드 전설’ 아담 셀립스키 사령탑…KKR 주도 ‘헬릭스’의 정체
삼성을 비롯한 글로벌 거두들이 뭉친 집결지는 글로벌 사모펀드 운용사 KKR(Kohlberg Kravis Roberts & Co.)이 야심 차게 출범시킨 ‘헬릭스 디지털 인프라스트럭처(Helix Digital Infrastructure, 이하 헬릭스)’다.
1976년 설립 이래 대형 인수·합병(M&A)과 바이아웃(Buyout) 투자를 통해 기업가치를 극대화해 온 KKR은 이번 프로젝트를 단순한 인프라 펀드가 아닌, 차세대 AI 데이터센터의 개발·전력·통신을 일체형으로 제공하는 턴키(Turn-key) 통합 플랫폼 기업으로 설계했다.
특히 헬릭스의 초대 수장으로는 글로벌 클라우드 황금기를 이끈 아담 셀립스키(Adam Selipsky) 前 아마존웹서비스(AWS) 최고경영자(CEO)가 낙점됐다. 2005년 AWS 창립 멤버로 합류해 클라우드 제국의 기틀을 닦고, 데이터 분석 기업 태블로(Tableau)의 세일즈포스 매각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뒤 AWS CEO로 복귀해 초거대 AI 클라우드 인프라 확장을 진두지휘한 인물이다.
빅테크의 니즈와 데이터센터 생태계의 복잡성을 누구보다 꿰뚫고 있는 셀립스키가 지휘봉을 잡았다는 점은 헬릭스가 출범과 동시에 글로벌 하이퍼스케일러들의 표준 인프라 공급자로 직행할 것임을 시사한다.
■ 엔비디아·비스트라·쿠웨이트투자청…‘AI·전력·자본’의 황금 삼각동맹
헬릭스는 출발선부터 독보적인 진용을 갖췄다. 삼성 6개사와 함께 글로벌 AI 칩 시장을 지배하는 엔비디아(Nvidia), 미국 최대 독립 발전사이자 전력 거두인 비스트라(Vistra Corp.), 그리고 막대한 오일머니를 굴리는 쿠웨이트투자청(KIA)이 창립 멤버로 어깨를 나란히 했다.
이번 연합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데이터센터 가동의 최대 난제로 꼽히는 ‘전력 절벽’의 해법을 사전에 내재화했다는 점이다. 통상 초대형 데이터센터 건립에는 부지 확보 후 전력망 연결(Interconnection)에만 수년이 소요되지만, 파트너로 합류한 비스트라의 전력망 솔루션을 통해 이를 정면 돌파한다.
비스트라는 원자력 발전부터 천연가스, 신재생에너지, 초대형 에너지저장장치(ESS)까지 다각화된 포트폴리오를 보유한 미국 최대 민간 발전사다. 24시간 중단 없는 ‘무탄소 기저부하 전력’(원전)을 데이터센터에 직결할 수 있는 송배전 인프라 역량을 갖추고 있어, 인허가 지연과 송전망 병목을 원천 차단하는 핵심 동력 역할을 맡는다.
‘엔비디아의 연산력 + 비스트라의 전력 + 삼성이 제공하는 하드웨어 솔루션 + KKR·KIA의 자본’이 결합한 완벽한 자급자족형 AI 생태계가 탄생한 셈이다.
■ ‘반도체-냉각-배터리-건설-금융’ 아우르는 ‘삼성 연합군’의 파괴력
삼성 관계사들의 이번 공동 투자는 그룹 차원의 사업 포트폴리오가 AI 인프라라는 하나의 목표 아래 완벽하게 톱니바퀴를 맞물린 모범 사례로 평가받는다. 전 세계 어떤 빅테크나 인프라 기업도 단독으로 제공하지 못하는 수직계열화 솔루션을 6개 사가 결합해 제공하기 때문이다.
첫째, 열관리(Thermal Management) 시장의 선점이다. AI 연산 집적도가 급상승하면서 공랭식(공기 냉각)은 이미 물리적 한계에 봉착했다. 이에 따라 서버 칩에 냉각액을 순환시키는 액체냉각이 필수적인데, 삼성이 2025년 인수한 유럽 공조 명가 플랙트그룹(FläktGroup)의 ‘액체냉각용 냉각분배장치(CDU, Coolant Distribution Unit)’ 기술이 핵심 해법으로 투입된다. 플랙트그룹이 보유한 글로벌 14개 생산 거점과 65개국 네트워크는 하이퍼스케일러들의 폭발적인 증설 속도에 즉각 대응할 수 있는 결정적 무기다.
둘째, 칩셋과 전원 안정성이다. 삼성전자 DS부문은 초고대역폭 메모리(HBM)를 포함한 첨단 AI 반도체를 안정적으로 수급하고, 삼성SDI는 무정전전원장치(UPS, Uninterruptible Power Supply) 및 배터리 백업 유닛(BBU, Battery Backup Unit) 등 고성능 리튬이온 배터리 솔루션을 통해 데이터센터의 전력 급변과 블랙아웃 위험을 차단한다.
셋째, 구축과 운영의 디지털화다. 삼성물산 건설부문은 다수의 하이퍼스케일 현장에서 검증된 첨단 데이터센터 EPC(설계·조달·시공) 역량을 가동해 공기 단축과 구조적 완성도를 보장한다. 여기에 국내 최고 수준의 전력사용효율(PUE, Power Usage Effectiveness) 설계 역량과 GPU 클라우드 서비스(GPUaaS, GPU as a Service) 노하우를 갖춘 삼성SDS가 소프트웨어 및 시스템 운영을 통합 지원한다.
삼성생명과 삼성화재는 이 대규모 프로젝트의 장기 자금 조달 및 운영 리스크 담보를 뒷받침하며 금융적 시너지를 완성했다.
■ “주도권은 우리가 쥔다”…부품 종속 탈피해 글로벌 표준 선점
그간 글로벌 반도체 및 하드웨어 제조사들은 빅테크의 설비투자(CapEx, Capital Expenditures) 사이클에 종속되어 실적이 출렁이는 ‘수주 산업의 덫’에 갇혀 있었다. 아무리 기술력이 뛰어나도 빅테크가 발주를 줄이거나 스펙을 변경하면 그 타격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했다.
그러나 헬릭스의 지분 10억 달러를 확보하고 창립 파트너로 참여하면서 구도는 180도 뒤집혔다. 데이터센터 부지 선정, 전력망 설계, 냉각 시스템 규격 제정 등 초기 기획 단계부터 삼성의 제품과 기술 표준이 우선적으로 반영되는 ‘락인(Lock-in) 구조’를 구축했기 때문이다.
삼성 관계자는 “이번 투자는 삼성 관계사들이 보유한 하드웨어 부품 경쟁력을 글로벌 시스템과 인프라 차원의 독보적 영향력으로 확장하는 변곡점”이라며 “글로벌 하이퍼스케일러들과 AI 생태계의 판을 짜는 핵심 동반자로서 입지를 확고히 하겠다”고 밝혔다.
AI 데이터센터가 국가와 기업의 미래 경쟁력을 가르는 패권 인프라로 격상된 지금, 삼성이 글로벌 연합군을 이끌며 ‘부품 공급선’에서 ‘생태계 오너’로의 진화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