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타임스 김은국 기자 | 글로벌 인공지능(AI) 반도체 훈풍과 뉴욕증시 반등이라는 강력한 대외 호재도 국내 증시의 뿌리 깊은 ‘수급 가뭄’을 해소하지 못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쏟아부은 약 9조7000억원 규모의 사상 초유 자사주 매입 화력이 지수 하단을 간신히 틀어막았으나, 오후 들어 기관의 5조원대 투매가 쏟아지며 코스피는 하루 만에 220포인트 넘게 널뛰는 극단적인 롤러코스터 장세를 연출했다.
호재가 나와도 주가가 고꾸라지는 이른바 ‘셀 온(Sell-on·재료 소멸에 따른 차익실현)’ 악순환이 대형주 전반으로 번지는 가운데, 개별 기업의 펀더멘털을 집어삼킨 기형적 수급 구조가 한국 증시의 기초체력을 갉아먹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 외인·기관·개인 9.7조 ‘투매 동맹’…홀로 받아낸 반도체 투톱 자사주
9월3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코스피 지수는 전 거래일 대비 16.76포인트(0.26%) 소폭 오른 6579.48에 턱걸이 마감했다. 지수는 간밤 미 증시 호조를 등에 업고 6650.33까지 산뜻하게 출발했으나, 오후 들어 급격한 투매에 휩쓸려 장중 6430선까지 곤두박질치는 등 아찔한 변동성을 겪은 끝에 낙폭을 겨우 만회했다.
반면 중소형 기술주 중심의 코스닥 지수는 기관과 외인의 매물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13.77포인트(1.71%) 하락한 790.21로 주저앉았다. 서울 외환시장에서 달러·원 환율은 9.4원 내린 1359.3원에 마감하며 안정을 찾았으나 증시 수급을 되살리기엔 역부족이었다.
이날 시장의 본질은 유가증권시장의 매매 동향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전통적인 시장 3대 주체인 기관(5조328억 원 순매도), 외국인(3조4958억원 순매도), 개인(1조1869억원 순매도)이 한꺼번에 쏟아낸 순매도 규모만 도합 9조7155억 원에 달했다.
시장 붕괴를 막아선 유일한 방파제는 무려 9조7246억원(장내 9조7053억원)을 순매수한 ‘기타법인’이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주주가치 제고와 주가 안정을 위해 집행 중인 역대급 규모의 자사주 장내 취득 물량이 고스란히 반영된 결과다. 반도체 투톱의 막대한 자사주 총알이 지수의 하방 붕괴를 방어했지만, 이 매수세가 시장 전반의 온기로 확산하지 못하면서 나머지 업종과 중소형주는 무차별적인 하락 압력에 노출되는 전형적인 ‘외화내빈(外華內貧)’ 구조가 노출됐다.
■ 미 금리 안정·AI 호실적 덮은 ‘오후 2시 매물 폭탄’
장 초반 대외 매크로 여건은 어느 때보다 우호적이었다. 미국 뉴욕증시는 4거래일 만에 일제히 반등에 성공했고, 장중 4.8%를 웃돌며 시장을 짓누르던 미 10년물 국채금리도 4.7%대로 내려앉으며 긴축 발작이 진정되는 양상이었다.
인공지능(AI) 하드웨어 밸류체인의 실적 확인도 잇따랐다. 델 테크놀로지스가 예상을 뛰어넘는 호실적으로 AI 서버 수요의 건재함을 입증했고, 브로드컴 역시 AI 맞춤형 칩(ASIC)을 앞세워 컨센서스를 상회하는 가이던스를 제시했다. 여기에 미국의 8월 ADP 민간고용 지표가 3만8000명 증가에 그치며 시장 예상치(4만7000명)를 크게 밑돌자, 구인·이직(JOLTS) 둔화와 맞물려 연방준비제도(Fed)의 추가 금리 인상 공포를 완화시켰다.
그러나 견고하던 시장 흐름은 오후2시를 기점으로 산산조각 났다. 오전 내내 관망세를 보이던 기관 창구에서 금융투자와 연기금을 중심으로 대규모 프로그램 매도 및 선물 연계 매물이 일거에 쏟아졌다. 지수가 순식간에 6430선까지 200포인트 이상 폭락하는 과정에서 시장을 뒤흔들 만한 새로운 돌발 악재는 발견되지 않았다.
미국과 이란 간 군사적 긴장 고조 속에 “이란이 쿠웨이트 미군기지를 타격했다”는 외신 속보가 전해지며 중동발 지정학적 리스크가 심리를 압박하긴 했으나, 최근 단기 급등했던 국제유가가 하향 안정화 흐름을 보였던 점을 감안하면 낙폭 과대의 주범은 펀더멘털 악화가 아닌 ‘기관의 수급 패닉’이었다는 분석이다.
■ 호재 뜨면 도망치는 국장…“금리·유가 내려야 수급 정상화”
최근 여의도 증권가가 가장 뼈아프게 바라보는 대목은 개별 기업의 굵직한 메가톤급 호재마저 주가 급락의 트리거로 악용되는 ‘셀 온(Sell-on)’ 현상의 고착화다.
실제 최근 삼성전기가 글로벌 빅테크향 AI 서버용 적층세라믹커패시터(MLCC, Multilayer Ceramic Capacitor) 초대형 공급계약을 체결하고, 두산퓨얼셀이 미국발 AI 데이터센터용 연료전지 대규모 수주를 따냈으며, 바이오 대장주 알테오젠이 조 단위 글로벌 라이선스 계약을 공시했음에도 주가는 당일 급락하거나 힘없이 미끄러졌다. 외국인과 기관의 기초 체력이 고갈된 상태에서 호재성 공시가 뜨자마자 이를 현금화 창구로 삼는 단기 차익실현 매물이 쏟아진 탓이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기형적 수급 왜곡이 해소되지 않는 한, 개별 기업의 호재가 주가 상승으로 이어지는 정상적인 시장 메커니즘이 작동하기 어렵다고 진단한다.
한지영 키움증권 연구원은 “대형 호재성 재료 발표 이후 반복되는 셀 온 현상은 개별 기업의 본질적 가치나 펀더멘털 훼손 때문이 아니다”라며 “단기적인 매크로 불확실성이 지속되는 가운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자사주 매입 물량을 제외하면 시장 전반의 신규 매수 여력이 일시적으로 급격히 말라붙은 탓”이라고 짚었다.
한 연구원은 이어 “결국 증시 전반의 수급 환경과 밸류에이션 멀티플이 정상 궤도로 복귀해야만 기업들의 실적과 수주 모멘텀이 주가에 온전히 반영될 수 있다”며 “이를 위해서는 미국 장기 국채금리의 추가적인 안정세와 국제유가의 완연한 레벨 다운이 선결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