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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05 (금)

[장승래 칼럼] 대기업이 스타트업 정신을 갖는다면

대기업 20년 버리고 사막에 선 창업가, 야생에서 발견한 진짜 '생존 방정식'
벼랑 끝에서 버텨낸 SK하이닉스의 독기…대기업도 '악바리 정신' 장착해야

장승래 칼럼니스트 |  대기업에서 20여 년을 일한 뒤 스타트업을 창업한 나에게, 회사라는 울타리도 브랜드라는 보호막도 없이 오롯이 ‘나’라는 이름으로 시장과 맞서는 일은 마치 사막에 홀로 남겨진 듯한 기분이었다. 모든 것을 스스로 증명해야 한다는 사실은 두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싸움이 해볼 만하다고 느끼게 된 이유는 분명했다. 스타트업이 대기업보다 훨씬 더 강한 경쟁력을 발휘하는 영역이 있기 때문이다.


스타트업이 대기업의 틈바구니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힘은 넉넉한 자금도, 풍부한 인재도, 충분한 시간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빠른 의사결정과 실행력, 죽기 살기로 버티는 간절함, 그리고 무엇보다 고객을 향한 집요함이 스타트업의 본질적인 경쟁력이다.


창업한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았을 때, 우리는 첫 상용 앱 "디버"를 만들어냈다. 함께 대기업을 나와 창업한 동료들과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우리가 여전히 대기업에 있었다면 이런 속도가 가능했을까?” 아마 기획서 결재 단계에서만 수개월이 흘렀을 것이다. 예산을 조율하는 데에도, 관련 부서와 협의하는 데에도 또 수개월이 걸렸을지 모른다. 어쩌면 출시 자체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스타트업에서는 즉시 완성이 가능했던 일이, 대기업 시스템 안에서는 시작조차 어려웠을 것이다.


대기업은 풍부한 자금과 우수한 인적 자원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조직 구조상 의사결정이 느릴 수밖에 없고, 현장과의 접점 또한 외부 협력업체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바로 그 지점에서 스타트업은 기회를 얻는다. 대기업의 틈새에서 스타트업이 경쟁력을 확보하고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물론 스타트업 역시 성장해 중견기업이 되고 대기업이 되면, 다시 느려질 수 있다. 아이러니하지만 그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얼마 전 한 독서모임에서 "슈퍼 모멘텀"이라는 책을 읽었다. 불황의 늪과 절체절명의 위기를 딛고 지금의 SK하이닉스에 이르기까지의 서사를 담은 책이다. 당시 회사는 파산 직전까지 내몰렸고, 주가는 액면가 아래로 떨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온 임직원이 스타트업과 같은 악바리 정신으로 버텨내며 오늘의 SK하이닉스를 만들어냈다는 이야기는 깊은 인상을 남겼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자랑스러운 성공담일 수 있다. 하지만 앞이 보이지 않던 당시, 그들은 얼마나 절박하게 버텼을까. 얼마나 악착같이 사업을 붙들고 일으켜 세우려 했을까. 그들의 피, 땀, 눈물의 이야기는 어떤 글로벌 기업의 성공 스토리보다 더 큰 도전으로 다가왔다. 나는 그 책을 통해 대기업도 스타트업처럼 일할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대기업이 정말 스타트업처럼 움직인다면 상상을 뛰어넘는 성과를 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게 됐다.


지금의 대기업들은 앞으로 10년후에도 지금과 같은 위치에 그대로 서 있을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한때 유행처럼 번졌던 대기업의 사내벤처를 떠올려보면, 단기간에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이유로, 조직의 인재를 방출한다는 이유로, 쉽게 제도를 접는 현실 속에서 과연 스타트업 정신이 자랄 수 있을지 오히려 의문이 든다. 사내벤처로 독립하여 우주(?)로 날아가는 우리 회사의 사례를 돌아봐도, 대기업은 계속해서 새로운 거주지를 찾아 우주로 탐사선을 보내야 한다. 그 탐사선이 실패하고 돌아올 때마다 실망하거나 책망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도전에 박수를 보내야 한다. 그리고 돌아온 이들의 경험을 인정하고, 그 실패의 비용까지 자산으로 사들일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대기업 안에 스타트업의 DNA가 심어진다. 그래야 새로운 도전이 가능해진다.  SK하이닉스처럼 스타트업 DNA를 가진 대기업이 앞으로도 계속 탄생하길 응원한다.

 

 

장승래 | ㈜디버 대표이사 - LG유플러스 사내벤처로 ㈜디버를 창업했으며, AI 기반 물류 서비스 디버와 디지털 메일룸 디포스트를 통해 기업 물류의 디지털 전환을 이끌고 있다. 현장에서 축적한 경험과 통찰을 바탕으로 산업, 기술, 비즈니스의 변화를 깊이 있게 전한다.​

 

※ [편집자주] 본 칼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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