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타임스 김은국 기자 | 이병태 규제합리화위원회 부위원장(KAIST 명예교수)가 한국 경제의 구조적 한계를 ‘3대 족쇄’로 규정하며, 인공지능(AI) 시대를 맞아 근본적인 제도 개혁이 필요하다는 강도 높은 문제의식을 제기했다. 단순한 경기 진단을 넘어 성장 모델 자체를 재설계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정부 주도의 산업 정책과 규제 체계 전반에 대한 재검토를 촉구한 것이다.
이 교수는 지난 4월28일 열린 '도산아카데미 애기애타 리더십 9기' 강연에서 ‘국가자본주의와 AI 시대의 한국 경제의 도전과 과제’를 주제로 발표하며, 한국 경제가 직면한 구조적 모순을 조목조목 짚었다. 그는 특히 AI라는 기술적 패러다임 전환기 속에서도 한국이 과거 고도성장기의 성공 경험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른바 ‘국가 주도형 성장 모델’이 여전히 정책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 오히려 민간의 혁신 역량을 제약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국가자본주의는 정부가 시장에 적극 개입해 주요 산업과 자본을 직·간접적으로 통제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제 체제를 의미한다. 이 체제에서는 민간 기업이 존재하더라도 국가가 정책, 규제, 공기업, 자금 지원 등을 통해 산업 방향을 주도하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전략 산업 육성이나 경제 위기 대응 과정에서 정부의 역할이 크게 확대되며, 시장의 자율적 자원 배분 기능보다 정책적 목표가 우선시되는 경향을 보인다.
첫 번째 문제로 그는 ‘국가자본주의적 경향의 심화’를 꼽았다. 정부가 산업 전반에 걸쳐 영향력을 확대하며 시장의 세부 영역까지 개입하는 구조가 고착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과거 압축 성장기에는 정부 주도의 자원 배분이 일정 부분 효율성을 가졌을 수 있지만, 기술 변화 속도가 비약적으로 빨라진 AI 시대에는 이러한 방식이 오히려 비효율을 초래한다”고 지적했다. 정부의 의사결정 구조는 필연적으로 복잡하고 시간이 소요되는 반면, 시장은 실시간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양자 간 괴리가 커질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특히 정부가 특정 산업을 ‘유망 분야’로 지정하고 재정·정책적 지원을 집중하는 방식은 시장의 자율적 선택 기능을 왜곡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됐다. 이는 단기적으로는 성과를 낼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민간 기업의 창의적 도전과 실험을 위축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분석이다. 결국 정부가 ‘선수’로 뛰는 구조에서는 산업 생태계 전반의 역동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두 번째로 이 교수는 한국 산업 전반을 얽매고 있는 ‘거미줄 규제’와 기득권 구조를 문제로 지목했다. 특히 AI와 같은 신기술은 기존 산업 질서를 빠르게 재편하는 파괴적 혁신의 성격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규제 체계는 이를 수용하기보다 억제하는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새로운 서비스가 등장할 때마다 기존 법체계에 없다는 이유로 제동이 걸리고, 기존 산업과의 충돌을 우려해 규제가 강화되는 구조가 반복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러한 규제 환경의 핵심 문제로는 ‘포지티브 규제 방식’이 지목됐다. 허용된 것만 가능한 구조에서는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이 등장할 여지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으며, 이는 곧 혁신의 속도를 늦추는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설명이다. 이 교수는 이 같은 규제 체계가 사실상 국내 AI 기업들의 글로벌 경쟁을 제약하는 ‘보이지 않는 장벽’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특히 기존 이해관계자와 기득권 집단이 규제 체계에 깊이 얽혀 있는 구조 역시 혁신을 저해하는 주요 원인으로 지적됐다.
세 번째로 그는 AI 시대의 핵심 경쟁력은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기술을 실험하고 확장할 수 있는 ‘제도적 환경’에 있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미국과 중국이 AI 패권을 놓고 경쟁하는 상황에서 한국이 취해야 할 전략은 단순한 재정 투입 확대가 아니라, 기업들이 데이터를 자유롭게 활용하고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기술 개발을 위한 지원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선행되어야 할 것은 규제 혁신이라는 주장이다.
특히 데이터 활용과 관련된 규제는 AI 산업 발전의 핵심 변수로 꼽혔다. 개인정보 보호와 보안이라는 명분 아래 형성된 규제들이 실제로는 데이터 활용을 과도하게 제한하고 있으며, 이는 AI 학습과 서비스 고도화에 필수적인 데이터 생태계를 위축시키고 있다는 지적이다. 그는 “데이터를 활용하지 못하는 AI 산업은 경쟁력을 가질 수 없다”며, 규제의 목적과 수단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강연의 말미에서 이 교수는 정부의 역할에 대한 근본적인 재정의를 제안했다. 정부는 산업의 방향을 직접 설정하고 주도하는 ‘선수’가 아니라, 공정한 경쟁 환경을 조성하는 ‘심판’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정부가 룰을 만들고 시장 참여자들이 그 안에서 자유롭게 경쟁하도록 하는 구조가 정착돼야 한다”며, 정책 패러다임 전환의 필요성을 재차 강조했다.
2026년 현재 한국 경제는 저성장 기조가 고착화되는 가운데, AI를 중심으로 한 산업 재편이라는 중대한 전환점에 서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제기된 이 교수의 문제의식은 학술적 논의를 넘어 정책 전반에 대한 실질적 변화 요구로 해석된다. 기술 개발과 투자 확대만으로는 글로벌 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규제 혁신과 제도 개선이 선행되어야 한다는이 교수의 지적은 한국 경제가 풀어야 할 핵심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